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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무연고자의 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GN시사신문 기자 입력 2020.06.12 14:17 수정 2022.05.20 14:18

시민기고 / 정진호(두드림장애인학교장)


이달 6일 ‘무연고자’로 세상과 작별한 동두천 시민이 있다. 무연고자는 가족이나 주소, 신분, 등을 알 수 없어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을 일컫는다. 올해 39세였던 그는 동두천시의 등록 장애인 중 한명이자 드물게 지체·지적 장애를 모두 가진 중복 장애인이었다.

1982년 출생 직후 보호시설에 버려진 그는 시설 책임자가 정해준 생일(6월 8일)과 이름(이00)에 기대서야 비로소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고 대다수 장애인들이 그렇듯 많은 시간을 힘겨운 장애, 차가운 편견 그리고 그로 인한 몸과 마음의 상처에 신음하며 성장했다.

보호시설의 아이들은 만 18세가 되면 누구나 독립을 해야 한다.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만 18세에 독립하라고 법이 정했기에 그 역시 몸만 한껏 커진 채 다시 철저한 혼자로 세상을 마주했다. 그리고 아마 꽤나 긴 시간 동안 혼자서 그저 살아내기에, 버텨내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그가 20살 되던 해에 ‘나’(정진호, 두드림장애인학교장)는 우연한 기회에 그와 인연이 닿았다. 숫기 없이 쭈뼛대던,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안절부절못하던 첫 모습에 나는 그의 지난 시간들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이 됐다. 그는 내가 운영하는 대성인쇄기획에 취직해 소소한 허드렛일부터 인쇄기술을 하나하나 몸으로 익혔고 차곡차곡 모은 월급으로 보험도 가입했으며 얼마 전부터는 임대주택에 입주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생의 첫걸음부터 혼자였던 그에게 ‘우리’라는 울타리가 점점 견고해 질수록 나 역시 흐뭇했다.

인쇄소 한편에서 시작한 야학이 ‘두드림장애인학교’가 되고 한 명 두 명 늘어난 식구들과 마음을 나누며 일상의 행복을 쌓는 동안에는 종종 소년같이 해맑은 미소로 주위를 밝혀줬다. 기특한 아들이자, 착한 동생이고, 믿음직한 친구이며, 의젓한 형인 동시에 자상한 오빠로서 식구들과 매 순간 진심으로 교감했고 서로를 보듬었다. 종종 그의 안경 너머에서 희망과 희열이 비칠 때면 짙게 묻어있던 외로움도 옅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6월 3일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진 그는 3일 후 너무도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가족들은 지독한 현실에 또 한 번 참담했다. 법적으로 그에게는 피를 나눈 가족이 없다는, 그는 결국 무연고 사망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에게는 ‘무연고자’인 그의 뇌사상태부터 약 3일 후 사망선고를 받을 때까지 지켜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법적 가족이 아니기에 사망과 장례에 관련된 일련의 절차를 함께할 권리는 애초부터 없었다. 솔직히 막막하고 참담한 생각이 세찬 밀물처럼 들이닥쳐서 마음껏 슬퍼할 여력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경황도 없었다.

상주인 나조차 무기력에 지쳐가던 그때 ‘동두천시’와 ‘동두천중앙성모병원’에서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줬다. 시에서는 그가 사망 전까지 입원치료받은 병원비 전액을 지원해 줬고 성모병원은 모든 장례절차를 정성스럽고 풍족하게 준비해 줬을 뿐만 아니라 혹여나 그의 죽음이 외롭거나 초라하지 않게 가장 큰 장례식장에서 많은 이들의 배웅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또 납골당에 안치되기까지 지불해야 할 많은 장례비용 역시 성모병원이 상당 부분 부담해 줬으며 부족할 뻔했던 나머지 장례비용 일부는 시에서 지원해 준 덕분에 식구들은 그를 떠나보내는 데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그를 발인하던 6월 8일은 공교롭게도 그의 호적상 생일이었다. 나와 인연이 닿은 20여 년 전부터 거르지 않고 미역국을 챙겨 먹은 날이지만 그날이 진짜 그의 생일인지는 궁금하지도 않았고, 아니라 해도 대수롭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가 한줌 가루가 돼 자연으로 돌아간 날이 1년 365일 중에 왜 하필 그날, 생일이었는지는 아주 오래도록 가슴이 시릴 것 같다. 그리고 유독 하늘이 파랗던 6월 11일, 그는 안흥동 공설묘지 납골당에 안치되며 고단한 삶에 모든 마침표를 찍었다.

그가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한 날부터 납골당에 안치된 8일 동안 힘들고 바쁜 와중에도 지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은 시청, 성모병원의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깊은 울림을 전해준 시청의 감동 행정과 대체 불가능한 성모병원의 묵묵한 헌신 덕에 그는 ‘법적 무연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외롭거나, 초라하지 않게 우리와 작별할 수 있었으며 나를 비롯한 두드림장애인학교 식구 모두 동두천의 따뜻함에 다시 한 번 마음 든든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따뜻한 마음으로 배웅해 주신, 같이 슬퍼하고 아픔을 보듬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언제까지나 내 아들일 그가 그곳에서는 고단함 없이 평안만 가득하길 가슴 깊이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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