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1924~1997) 할머니가 생존자 중 최초로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했고, 이후 전국의 생존자들이 잇따라 피해 사실을 알리며 위안부 인권 문제가 국제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2017년, 국회에서 ‘위안부 피해자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됨에 따라 매년 8월 14일은 공식·법적인 국가기념일로서 올해 2회째를 맞았다.
구름보다 하얗고, 꽃보다 예뻤을, 별 대단치 않은 일에도 까르륵 웃는 것이 즐겁고 행복했을 어린 소녀들은 협박·폭력·인신매매·유괴로 ‘위안소’에 끌려갔다. 문헌·증언에서 매음부, 창기 등으로 지칭된 소녀들은 4년 동안 부산, 일본, 대만을 거쳐 홍콩, 중국, 베트남, 싱가포르 등을 끌려 다니며 참혹하고 처절한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고 아직까지도 정확한 피해인원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 어마무시(?)한 비극은 소녀들의 삶을 완벽히 무너뜨렸고,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갔다. 자살을 하거나 목숨 걸고 도망쳤지만 잔혹한 일본군은 기어코 다시 잡아와 소녀를 때리고 또 때렸다.
기자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픈 이야기가 담긴 영화들을 적잖이 봤다. 이후 철저하고 집요하게 뻔뻔한 저들의 망언·반성 없는 행동에 분노가 쌓였고, 가끔씩 마주하는 소녀상을 볼 때면 먹먹해졌다. 피해 할머니들이, 국민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당연한 진실과 분명한 역사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다.
한 피해 할머니는 자신의 자녀에게 ‘끝까지 싸워다오. 사죄를 받아다오. 그래야 죽어서도 원한 없이 묻혀 있을 것 같구나. 나 같은 아픔이 다시 없어야 해’라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한(恨)을 토해냈다고 한다. 하지만 저들은 ‘어떤 강제도 없이 자원한 것이다’, ‘일본은 책임을 다했으며 지금의 주장은 결국 돈 때문이다’, ‘과거 사과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등 지금도 당당히 거짓을 말한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후 지난 1992년부터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 정부의 사죄와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 회복을 촉구하는 수요집회가 27년 간 이어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14일은 1400번 째 집회가 열린 날이기도 하다. 특히, 이날은 광화문 옛 일본 대사관 앞과 국내 13개 도시, 일본, 영국, 호주 등 세계 9개국 21개 도시에서도 공동으로 진행됐다.
동두천의 첫 번째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행사도 같은 날(14일) 평화공원 소녀상 앞에서 열렸다. 하지만 많은 시민이 함께 피해자를 기리고, 역사적 아픔을 보듬을 것이란 기자의 기대는 빗나갔다. 한 여름 볕이 따갑던 현장에는 여당 지역위원회 주최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렸고 최용덕 시장, 동두천·연천의 여당 관계자 등 30여 명만이 조촐하게 피해자들을 기렸다. 행사 규모가 작아도, 특정 정당이 주최해도 의미는 있겠지만 모두가 기억해야 할 아픔·고통, 역사적 사실이 담긴 국가기념일에 왜 많은 시민이 함께하지 못한 건지 아쉽고 의아했다.
또 한편으로는 자칫 이 행사가 정치적 결집 혹은 이해타산 때문에 시민 동참을 원치 않는 것으로 비춰질까 우려도 됐다. 살아있는 매 순간이 고통이었을 피해자들을 위해 여전히 철저하고 집요하게 뻔뻔한 저들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이제 후대인 우리의 과제이자 숙제다. 피해자들이 감내한 27년의 진심과 외침은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고 그것이 후대의 거짓·편견·오해·이해타산으로 곡해(曲解)되면 안 된다. 바라건대, 내년부터는 많은 시민의 동참과 초당적 참여가 이뤄지는 ‘동두천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행사가 개최되길 소망한다.